본대가 도서관 앞에 이르렀을 때 순식간에 5백여명 학생이 몰려들었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야당 탄압 중지’ 등 구호를 외치며 본관 건물 뒤쪽을 돌아 공대 2호관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는 단번에 2천명으로 늘었으며, 다시 정문이 보이는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는 7천 명으로 불었다. 교내 시위는 다시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세갈래로 나눠 교문을 빠져나온 부산대생 4천여명은 오후 2시 남포동, 시청, 부영극장, 미화당 백화점 앞 등지에 집결, 2~3백 명 단위로 숨박꼭질 시위를 벌였다. 오후 3시 국제시장 앞길에는 2~3만 군중이 모였다.
시위 주도권이 학생에서 시민의 손으로 넘어갔다. 진정한 의미의 부마 민주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시민과 학생들은 구호를 함께 외치고 애국가 등을 부르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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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두워지면서 귀가길 시민, 고교생, 직장인, 근로자가 합세, 시위대는 5만명으로 불어났다. 밤 10시부터 통행금지를 실시한다는 발표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유신철폐’, , ‘독재타도’, ‘언론자유’, ‘김영삼 제명 철회’ 등 구호가 17일 새벽까지 메아리친다.
16일 하루 동안 남포동 파출소 등 11개 파출소가 피습되었다.
-광주 매일 518 특별 취재반, [정사 5.18]-
부마항쟁(19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의 유신정권타도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