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인쇄소. 당시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 天道敎月報≫를 간행하였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普成學院)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하면서 따라 동교(同校)에 속해 있던 보성사인쇄소를 창신사와 병합하고 그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이 보성사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광문회(光文會)의 신문관(新文館)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회서적 및 학교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출판문화 향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한때 보성사의 적자가 누적되자 교회간부는 손병희(孫秉熙)에게 보성사의 폐쇄를 건의한 적도 있었다. 보성사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1919년 3·1운동 때 발포된 독립선언서의 인쇄였다. 1919년 2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졌다. 그달 27일 사장 이종일(李鍾一)은 공장감독 김홍규(金弘奎), 총무 장효근(張孝根)과 같이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극비리에 인쇄를 완료하였다. 총 2만 1000매의 선언서를 성공적으로 인쇄한 후 이종일의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28일 각지에 보냄으로써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도중 인쇄소의 작업소리를 듣고 음흉하기로 소문난 형사 신승희(申勝熙)가 현장을 목격하였다. 이에 놀란 이종일이 형사의 옷자락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와 뒤에 손병희로부터 받은 5,000원을 주며 눈감아주기를 간청해서 위기를 넘겼다. 또 10시가 넘어 인쇄 완료된 선언서를 손수레에 싣고 교당으로 가는 도중 일본경찰의 검문을 받았으나, 손수레의 짐은 인쇄된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옮길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무사히 은닉됨으로써 3·1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보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