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신흥 무관 학교를 기반으로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무장 독립 운동 단체.
[설명] 1919년 4월에 남만주 서간도에 무장항일운동단체로 조직된 군정부(軍政府)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청으로 1919년 11월에 명칭을 서로군정서로 변경한 독립군 조직. 남만주 서간도의 한인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은 1919년 3·1운동 이후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통일적인 독립운동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1919년 4월, 유하현(柳河縣)·통화현(通化縣)·흥경현(興京縣)·환인현(桓仁縣)·집안현(集安縣) 등 남만주 각 현의 지도자들과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기족 조직을 확대하여 한족회(韓族會)로 개편함과 동시에 산하 군사조직으로 군정부(軍政府)를 편성하였다. 총재는 이상룡(李相龍), 부총재 여준(呂準), 참모장 이탁(李?) 등이 선임되었다. 그 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안공근(安恭根)·김병헌(金炳憲)을 파견하여 ‘군정부’라는 명칭에 오해가 있으니 명칭을 임시정부 산하의 서로군정서로 변경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1919년 11월에 서로군정서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조직은 독판제(督辦制)에 의해, 독판부(督辦府) 아래 사령부·참모부(參謀部)·정무청(政務廳)·군무청(軍政廳) 등을 두었다. 주요 간부에는 독판부 독판 이상룡, 부독판 여준, 정무청장 이탁(李鐸), 군무청장 양재훈(梁在薰), 참모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지청천(池靑天), 내무사장 곽문(郭文),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 재무사장 남정섭(南庭燮),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이 임명되었다. 서로군정서는 군자금 모집, 선전활동, 군사활동에 주력하였다. 군자금 모집은 주로 한족회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한족회의 관할구역인 유하현, 통하현 등지의 한인들에게 매호당 1원 5각의 군자금을 부과하였다. 이밖에 국내에서도 자금을 모집하였다. 서로군정서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업은 독립군 양성의 근간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1919년 5월 3일,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편하는 한편, 칠도구(七道溝)·쾌대모자(快大帽子)·고산자(孤山子)·하동자(河東子)에 분교를 두었다. 개편된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에는 이세영(李世永), 연성대장에 지청천, 교관에 오광선(吳光鮮)·신팔균(申八均)·이범석(李範奭)·김경천(金擎天) 등이 선임되었다. 하사관 3개월, 장교 6개월, 일반독립군 1개월 과정의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1920년 8월 현재, 2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예하부대로 의용대를 편성하여, 국내의 적(敵) 기관을 파괴, 친일분자, 밀정 등을 숙청했다. 채찬(蔡燦, 일명 白狂雲)이 지휘했던 제1중대는 1919년 5월 삼수군 영성주재소 습격과 1919년 7월 후창군 친일파 군수 처단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 밖에도 서로군정서는 다양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1919년 7월 강계군의 삼강주재소와 문옥면사무소를 습격한 것을 비롯하여, 1920년 5월 문상식(文相植) 등이 경북 지역에서 관공서를 폭파하였다. 1920년 8월 김동순(金東淳)·한우석(韓愚錫) 등이 조선총독부 총감을 처단하고 일제기관을 폭파하려다가 체포되었으며, 1921년에는 만주의 친일단체 보민회(保民會)를 해체시켰다. 한편, 1920년 2월, 좀더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주장한 현정경(玄正卿) 등 다수의 소장청년파들이 이탈하여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일본군 토벌작전으로 인해 본부는 북만주 액목현(額穆縣)으로, 지청천이 지휘하의 서로군정서군 500여 명은 안도현(安圖縣)으로 옮겼다. 1921년 조직을 위원제로 재정비, 위원장에 이탁, 경리위원장 이진산(李震山), 총사령관 박용만(朴容萬) 등이 임명되었으나, 박용만이 일제에 투항한 뒤 내분이 일어나, 1922년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통합되었다.
서로군정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