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상의 유파로서 영학파(嶺學派)·퇴계학파(退溪學派)·남명학파(南冥學派)·여헌학파(旅軒學派)의 총칭. 영남학파의 학맥은 정몽주(鄭夢周)에서 비롯해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를 거쳐 김종직에로 계승된다. 김종직은 도학과 문학으로 유명해 당대 유학의 조종이 되었다. 그는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저명한 학자로는 현풍의 김굉필(金宏弼)·곽승화(郭承華), 함양의 정여창(鄭汝昌)·유호인(兪好仁)·표연말(表沿沫), 경주의 손중돈(孫仲暾), 선산의 강백진(康伯珍), 성주의 김맹성(金孟性), 안동의 이종준(李宗準), 청도의 김일손(金馹孫), 밀양의 박한주(朴漢柱) 등이다. 이 학파의 특징은 조선 초기의 학문적 경향이 그러하였듯이 여말의 영향을 받아 유학의 요소 중에서 한편으로는 주로 실제적인 정치·경제·법률·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는 한당류(漢唐類)의 학풍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성리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송학류(宋學類)의 학풍을 혼합한 것이었다. 이 학파에서 정여창과 김굉필은 특히 도학에 정진하여 후세 한국 성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학문적 토양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정여창은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3년 동안 나오지 않고 오경(五經)을 연구해 그 심오한 뜻을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가장 치중하였고, 궁리(窮理)함을 위주로 하였다. 그리하여 『중용』의 주자장구(朱子章句) 중에서 ‘기이성형, 이역부언(氣以成形, 理亦賦焉)’의 설을 따르지 않고 ‘안유후기지이호(安有後氣之理乎)’라 하여 기(氣)에 뒤지는 이(理)가 있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뒤에 퇴계학파에서 주리설(主理說)을 주장하는 단서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김굉필은 존양(存養)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그것에 도달하는 수단으로는 성경(誠敬)을 주로 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학에서 새로운 학문 경향이었다. 그의 학통은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에게로 계승되었고, 조광조의 학통은 다시 성수침(成守琛)·성혼(成渾) 부자에게 이어졌으며, 김안국의 학통은 김인후(金麟厚)에게 전수되었다. 또 이언적(李彦迪)의 스승이 김종직의 제자 손중돈이었으니 동방의 사현(四賢: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은 이 영학파의 이학자(理學者)와 그의 후예들이었다. 그런데 이 영학파는 연산조에 이르러 훈구파와의 반목 갈등으로 위세가 침몰되었는데, 학술·문장·절의로 정계와 재야에서 대활약을 했던 당대의 유일한 학파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영남우도(嶺南右道)를 중심으로 조식의 학식과 덕행을 존숭하고 추종하는 학파가 새로이 형성되었다. 이를 남명학파라 하였다. 이 학파의 저명한 인물로는 오건(吳健)·김우옹(金宇?)·정구(鄭逑)·최영경(崔永慶)·김효원(金孝元)·곽재우(郭再祐)·정인홍(鄭仁弘)·정탁(鄭琢)·하항(河沆)·하진(河?) 등을 들 수 있다. 이 학파의 특징은 반궁체험(反窮體驗)·지경거의(持敬居義)·충신진덕(忠信進德)·독행수도(篤行修道)라 하겠다. 천길 절벽 같은 기상을 가진 조식은 ‘경의(敬義)’ 두 글자에 힘을 쏟아 공리공담을 배척하고 실천궁행함으로써 학문과 덕행을 쌓아 갔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의 학덕에 영향을 받아 기절(氣節)과 의리를 숭상하고 추종하였다. 오건은 자질이 순후하고 기상이 홍대하며 의연하고 효행이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학식에 있어서는 『대학』과 『중용』에 밝아 이황도 경탄하였다. 최영경의 청백하고 의로운 절개는 세인을 감복시켰다. 그는 의리가 아니면 한 개의 터럭도 취하지 않았다. 김우옹은 당대 제일의 강관(講官)으로 알려졌으며 ‘사무사(思無邪)’·‘무불경(毋不敬)’·‘무자기(毋自欺)’·‘신기독(愼其獨)’의 네 구를 진학의 지표로 삼았다. 정구는 경학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에 공이 크며, 정탁은 경사(經史)·천문·지리·병가에 정통하였다. 이들 중에서 김우옹·정구·정탁은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했던 학자들이다. 같은 시기에 영남 좌도(嶺南左道)에서는 이황의 덕행을 숭모하고 그의 학문 사상을 추종하는 유파가 형성되었다. 이른바
영남학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