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의 좌익정당. 1935년 6월 29일 신당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7월 5일 조선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인독립당이 연합한 ‘한국민족혁명당’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한국민족혁명당이 결성의 모체가 되었던 단체들이 표면적으로만 해체성명서를 발표하고 실제로는 여전히 독자적 대외활동을 이어나갔고, 서로 간의 혁명노선의 차이로 결성 7개월 만에 조직 내의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 분열은 구성원간의 사상적 차이와 함께, 독립운동방략의 차이에 대한 갈등, 그리고, 양대세력인 김원봉과 지청천(池靑天) 양파의 대립에서 파생된 결과였다. 특히 김원봉파인 조선의열단의 전횡과 독단이 문제가 되었는데, 그 결과 한국독립당의 박창세(朴昌世)·조소앙(趙素昻)과 신한독립당의 민병길(閔丙吉)·조성환(曺成煥)·홍진(洪震) 등이 1935년 9월을 전후하여 탈당하여, 한국민족혁명당의 기세는 크게 저하되었다. 당 잔류 인물들은 1937년 1월, 난징에서 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조직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명하도록 결의하고, 김원봉·지청천·윤기섭(尹琦燮)·성주식(成周寔)·신익희(申翼熙)·윤세위(尹世胃)·김상덕(金尙德)·최동오(崔東旿)·천병일(千炳日)·유동열(柳東說)·김홍서(金弘敍)·이경산(李景山)·정팔선(鄭八仙)·정일붕(鄭日朋) 등을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1937년 3월 청당(淸黨)과 당적제적 등의 갈등 속에서 지청천일파가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여 탈당하자, 김원봉의 조선의열단이 조선민족혁명당을 독점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루거우차오사변〔蘆溝橋事變〕 이후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인사들이 김원봉의 중간적인 좌경노선을 비판하며 탈당하여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조직하였으며, 공산주의자 왕지연(王志延) 등도 재차 탈당함으로써 조선민족혁명당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