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조선에서 발생한 첫 번째 사화(士禍)로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사초(史草)에 불손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발생했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의 편찬 과정에서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와 관련된 불경한 내용이 적혀 있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을 시작하여, 이후 김일손과 교류했던 청요직 인사들의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이 붕당을 결성한 행위로 인식되며 확대되었다. 김일손의 사초 가운데 문제가 된 부분은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한 일이었는데, 「조의제문」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단종(短宗, 재위 1452~1455)에 비유하여 세조의 찬탈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김종직이 제자들과 함께 붕당을 결성해 역심(逆心)을 품었던 것으로 해석되며 사건이 확대되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 삼았던 것은 이극돈(李克墩)과 유자광(柳子光)이었다.
무오사화는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 이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사림 세력이 훈구 세력과의 충돌 속에서 나타난 정치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즉위 초부터 대간(臺諫)들과 대립했던 연산군이 사초 문제를 이용해 언론을 탄압하며 정치적 입지를 확대한 사건이기도 했다.
무오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