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 식민지시기 만주 장백현과 조선 함경북도 갑산군 인근 지역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일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로서, 해방 이후부터 김일성파와 함께 북한 정치를 주도하였던 정치세력. [설명] 이들을 ‘갑산계’라고도 하는데, 과거에는 김일성파를 갑산계라고도 불렀으나,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갑산파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함경북도 갑산과 그 인근지역에서 공산주의 지하활동을 하던 인물들이 1936년∼1937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과 연계하여 민족통일전선체인 ‘재만한인조국광복회’ 지부를 설립하고, ‘갑산공작위원회’와 같은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하는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역사에 등장하였다. 1937년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부대가 함경북도 보천보(普天堡)를 습격할 때 이를 도왔으며, 이를 계기로 일제에 의해 거의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이들의 조직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들의 생성은 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우선 이들의 항일무장투쟁은 중국공산당의 지도 하에 중국인들과 함께 수행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중국과의 관계는 연안파가 더욱 밀접하고 소련과의 관계는 소련파가 더욱 밀접했다고는 하지만, 갑산파는 소련과 중국 두 세력 모두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갑산파가 중국 및 소련과 맺고 있는 친밀성이 아니라 두 세력 사이에서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또한 중국과 소련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는 사실일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항일투쟁과정에서 보여준 핵심지도부의 강조, 대중성 강조, 근거지 중심의 투쟁 형태들이 8·15 이후 그들의 정치 활동에 큰 영향을 준 요소라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항일투쟁과정에서 근거지 대중들을 지도하며 무장대열을 이끌 지도부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은 8·15 직후, 지역별로 자생적 정치세력들이 난립하던 상황에서 통일된 지도부 건설의 중요성을 다른 어느 정치집단보다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게 했다. 이는 통일된 지도부 건설에 적극적이지 못한 집단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가능하게 했고, 이후 북한의 독자적인 중앙권력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아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대중과의 밀접한 관계는 항일무장투쟁 당시 무장세력을 충원하고 밖에서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존재로서 일제의 막강한 병력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역시 사활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지도부와 대중과의 밀접한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이들은 8·15 직후, 서울 중앙의 정치상황과 지방의 정치상황이 유기적이지 못했고, 당시 모든 정치지도자들의 관심이 서울의 정세에만 쏠려 있는 상황에서 지방으로 내려가 대중들을 직접 지도하면서 자신들의 노선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다른 정치집단에 비해 지역단위의 정치상황을 가장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대중에 대한 지도와 대중들의 이들에 대한 지지는 차후 권력을 형성해 나가는 데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항일무장투쟁의 형태였던 근거지노선은 8·15 이후 자주적 독립국가 수립의 방법으로써 ‘민주기지노선’으로 변화한다. 갑산파는 북한 당국에 의해 정식으로 불린 명칭은 아니지만, 박금철(朴金喆)을 우두머리로 하는 일단의 공산주의자들이 1967년에 숙청되면서 이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부정적인 인식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통용되던 명칭이다. 이들이 활동하던 일제 식민지시기부터 1967년까지 이들이 동 명칭에 의해 하나의 파벌로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이들이 식민지 시기의 행적에 의해 상호간에 일체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있다. 6·25전쟁 전까지는 북한은 여러 정치세력들이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연립 정권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6·25전쟁 패전으로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남로당파를 비롯한 대립세력을 제거하였고, 또한 1950년대 중반에 진행된 이른바 반종파투쟁 과정에서 갑산파가 승리함으로써 북한정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60년대 말에 김일성의 후계구도 문제로 갑산파도 숙청의 대상이 되어, 19
갑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