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3년(명종 23) 7월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이 각각 운문(雲門 : 경상북도 청도)과 초전(草田 : 경상남도 울산)을 근거로 봉기이다. 두 세력은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작전도 상의해 연합전선의 태세를 갖추었다고 보여진다. 경상남도 일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민중 봉기로, 다른 지역 세력과 연합하여 확장되면서 중앙 정계와도 연계 가능성을 보여 줬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1170년(의종 24)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킨 후 정권 책임자가 계속 바뀌면서 정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지배층은 각지에 농장을 확대하고 백성들은 고리대와 과중한 조세 부담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출신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유랑하거나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무신 정권 초기에는 특히 남부 지역의 민란이 거셌는데, 김사미⋅효심의 봉기는 그중 대표적이면서도 독특한 성격을 지녔다.
중앙 조정에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장군 전존걸(全存傑)에게 장군 이지순(李至純)⋅이공정(李公靖)⋅김척후(金陟侯) 등을 거느리고 출정케 하였으나 계속 패하고 말았다.
연이어 패배를 당한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무신 집권자였던 이의민(李義旼, ?~1196)의 아들 이지순이 김사미 일당과 내통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으나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이의민이 경주(慶州)를 본관으로 하여 이 일대에 기반을 갖고 있었으므로, 김사미 일당과 내통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자 하였다고 보고 있다.
김사미 세력은 같은 해 11월 정부에서 파견한 상장군 최인(崔仁), 대장군 고용지(高湧之)의 토벌군에게 격파되었고, 이듬해인 1194년(명종 24) 2월 김사미가 투항하였으나 곧 참형에 처해졌다. 효심도 얼마 후 사로잡혀 봉기는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