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3?1 운동 직후 연해주에서 결성된 임시정부
[설명] 1919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들이 건립한 임시정부. 1917년 연해주 일대 각종 한인 단체들이 결집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결성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국제 정세가 새롭게 전개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19년 3월 17일(2월 25일이라는 설도 있다)에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하였다. 최고의결기관인 총회와 이를 대행할 상설의회, 독립군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할 선전부, 독립군 자금모금을 담당할 재무부, 무기조달을 담당할 외교부 등의 집행부를 둠으로써 의회기능뿐 아니라 사법, 행정 기능까지 갖추었으며, 의장에 문창범(文昌範), 부의장에 김철훈(金哲勳), 서기에 오창환(吳昌煥)을 선출하고, 각계각층을 망라해 70~80명의 의원을 뽑았다. 그리고 별도의 행정부를 조직하여 대통령에 손병희(孫秉熙), 부통령에 박영효(朴泳孝), 국무총리에 이승만(李承晩), 탁지총장 윤현진(尹顯振), 군무총장에 이동휘(李東輝), 내무총장에 안창호(安昌浩), 산업총장에 남형우(南亨祐), 참모총장에 유동열(柳東說), 강화대사(講和大使)에 김규식(金奎植)을 추대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결의안을 통해 ① 대한국민의회는 조국독립의 달성을 기약하며 세계민족자결주의에 기인하여 한국민족의 정당한 자주독립을 주장함 ② 한일합방조약은 일본의 강압적 수단으로 성립한 것이고 우리 민족의 의사가 아니므로 그 존속을 부인하며 일본의 통치 철폐를 주장함. ③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의에 대표를 보내어 우리의 독립운동과 정부 건설의 승인을 요구하며 국제연맹에의 참가를 주장함. ④ 한국 독립운동의 실정을 세계에 선전하며 정부 건설의 사실을 각 국 정부에 통지하여 우리의 주권을 주장함. ⑤ 이상의 목적이 인도와 정의의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면 일본에 대하여 혈전 포고를 주장함을 천명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이러한 사실을 각국 영사관에 통보하는 하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윤해(尹海)·고창일(高昌一)을 파견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의연금 모집과 청년들의 군사훈련을 위한 훈련소를 설치하는 등 임시정부로서의 활동을 진행하였다. 1919년 4월 이후 상해임시정부와 통합 논의를 진행하여, 1919년 8월 30일에 대한국민의회의 해산을 결의하였으나, 실제 통합이 합의와는 달리 진행되자 대한국민의회 측은 크게 반발하여, 관계자 중 이동휘만 국무총리로 취임하고 통합정부의 교통총장으로 선출된 문창범은 취임을 거부한다. 1920년 2월 25일, 문창범 등은 대한국민의회의 재건을 선언하고 러시아 한인을 결집해나갔으나, 1920년 4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의 적군(赤軍)을 공격하며, 한인 독립운동가가 체포되는 상황이 전개되자 5월에 극동공화국 흑룡강주(黑龍江州) 블라고베시첸스크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후 적군에 가담하여 흑룡강 일대에서는 가장 큰 세력이 되었으나 좌파 성향의 한인총회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하게 되면서 쇠퇴하였고, 이후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는 한인동맹(韓人同盟)이 러시아 한인사회를 통괄해나갔다. 1917년 연해주 일대 각종 한인 단체들이 결집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결성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국제 정세가 새롭게 전개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19년 3월 17일(2월 25일이라는 설도 있다)에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하였다. 최고의결기관인 총회와 이를 대행할 상설의회, 독립군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할 선전부, 독립군 자금모금을 담당할 재무부, 무기조달을 담당할 외교부 등의 집행부를 둠으로써 의회기능뿐 아니라 사법, 행정 기능까지 갖추었으며, 의장에 문창범(文昌範), 부의장에 김철훈(金哲勳), 서기에 오창환(吳昌煥)을 선출하고, 각계각층을 망라해 70~80명의 의원을 뽑았다. 그리고 별도의 행정부를 조직하여 대통령에 손병희(孫秉熙), 부통령에 박영효(朴泳孝), 국무총리에 이승만(李承晩), 탁지총장 윤현진(尹顯振), 군무총장에 이동휘(李東輝), 내무총장에 안창호(安昌浩), 산업총장에

대한국민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