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펑톈 성[奉天省] 류허 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 시거우[西溝] 다화셰[大花斜]에서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항일무장독립군. 3·1운동이 일어나자 국내로부터 만주로 건너오는 동포들이 수십만에 달해 서간도 각지에 산재하던 의병 영수, 보약사(保約社) 대표, 향약계(鄕約契) 대표, 농무계(農務契) 대표, 포수단(砲手團) 대표 등 560여 명이 모여 각기 분립된 단체를 해체하고 독립 쟁취를 위한 단일기관으로 대한 독립단을 조직했다. 대화사에 본부를 두고 지방조직을 갖춘 뒤 독립군의 편성과 훈련에 주력했다. 중앙본부의 주요 요인들은 대부분 1910년 전후의 이름 있던 의병장들이었으며, 의병전쟁 당시 게릴라 전법의 경험을 살려 3~4명을 1대로 한 결사편의대(決死便衣隊)로 국내에 진격하여 일본 군경과 친일파를 숙청하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대한독립단은 발족 당시 상해 임시정부를 반대하고 조선왕조 복위에 뜻을 둔 단체였으나, 참모부장 조병준(趙秉準)이 평안북도 독판이 되면서부터 상해 임시정부를 상부로 추대하게 되었다. 1920년 1월 이후 단군기원 또는 융희를 주장하는 박장호·백삼규·전덕원·이웅해(李雄海)·김평식 등의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대한민국 연호사용을 주장한 조병준·신우현(申禹鉉)·변창근(邊昌根)·김승학(金承學) 등의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분리, 대립했지만, 독립운동에는 상호 협력하였다. 1920년 7월경 한족회·대한청년단연합회와 합류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사령부에 통합되었다.
대한독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