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이른바 청류(淸流)를 앞세우는 준론(峻論 : 강경론자들의 주장) 탕평정책을 통해 기존의 노론 우위의 정국에 변화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을 때, 반대를 표명한 정파이다. 정조대에 앞서 영조대에 취해진 탕평책은 붕당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없애고자 명예와 절의 보다도 타협을 종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였다. 이에 당시 대립하던 노론·소론 중에 온건론자들이 이를 지지, 그 정국이 완론(緩論) 탕평이라 일컬어졌다. 그리고 그 참여자들은 탕평당이라 불리기까지 하였다. 영조의 완론 탕평은 이와 같이 붕당간의 병진(?進 : 함께 나아감)을 기본 방침으로 했으나, 기반 확보 과정에서 노론의 우위를 피할 수 없었다. 탕평정책은 노·소론간에 청류를 자처하는 부류의 반대에 부딪혔다. 영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혼인 관계를 통해, 특히 온건한 노론계 대신들과 유대를 맺어 지지 세력으로 삼게 되었다. 영조의 완론 탕평은 붕당간의 격심한 대립을 일단 수습하는데 효과적이었으나, 혼인 관계를 수단으로 지지 세력을 확보한 나머지 정국 운영에서 척신(戚臣)의 비중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탕평당계 척신들은 영조대 중반에 이미 세력을 이루어 남당(南黨)이라 불리며 청류세력인 동당(東黨)과 대립했을 뿐 아니라, 청류적 정치관을 가진 사도세자와도 반목하였다. 세자 사사(賜死)사건 뒤, 영조로부터 세손(뒤의 정조) 보호를 부탁받은 인물도 척신의 위치에 있던 홍봉한(洪鳳漢) 등으로서 이들도 북당(北黨)이라는 세력으로 남당과 대립하였다. 북당은 세손 보호의 임무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한편 남당으로부터 ‘노론의 우위’를 방기하고 시세에 편승한다는 공격을 받았다. 영조를 이어 즉위한 정조는 조제(調劑) 보합(保合)의 인재 등용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계승하면서도, 사대부의 의리와 명절을 중요시해온 청류들을 대폭 기용하였다. 정조는 노론의 우위 여부를 문제삼는 기존의 척신당 틈바구니에서 왕정체제 확립의 한계를 직시하였다. 이리하여 그간 양 척신당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정계의 중심부로 대폭 끌어들여 이른바 준론탕평 또는 청류탕평을 펴게 되었다. 청류는 영조 말에 청류당 또는 청명당(淸名黨)을 이루어 척신당을 비판하던 노론계 인사인 김종수(金鍾秀)·김치인(金致仁)·이명식(李命植)·유언조(兪彦造)·윤시동(尹蓍東)·남유용(南有容)·서유린(徐有隣)·송인명(宋仁明)·정존겸(鄭存謙) 등이 주축이었다. 그러나 다른 당색도 배제하지 않은 가운데 정조 스스로 규장각 및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를 통해 비노론계의 진출을 활성화시켜갔다. 1788년(정조 12)에는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한 남인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 노론과 남인의 보합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이에 호응한 영남 남인들이 1792년에 그간 노론의 우위 아래 금기되다시피 한 임오의리(壬午義理) 문제를 제기, 노론을 크게 당혹시키는 형세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노론 내부의 시파·벽파의 분열은 이러한 형세 변화를 배경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즉, 청류 가운데에서도 노론의 우위를 고수하는 부류가 벽파를 이루었다.
벽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