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회(會)의 명칭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뜻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난 뒤 전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요하고, 이어서 각종 이권을 탈취하는 등 경제적 침탈을 강화하였다. 6월에 나가모리(長森藤吉?)가 어공원(御供院) 소관의 산림·천택(川澤)과 황무지 개간권을 이양 받고자 일본공사를 통해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왔다. 이에 유학(幼學)과 품관(品官)들은 반대 상소운동을 벌였고, 각 언론기관도 반대 사설을 실어 여론 형성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이 계획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반대운동을 벌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송수만(宋秀萬)·심상진(沈相震) 등이 1904년 7월 13일서울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중민회의(衆民會議)를 열어 보안회를 발기하였다. 회장에 신기선(申箕善), 부회장에 정유인(鄭裕寅), 대판회장(代辦會長)에 송수만이 추대되었다. 그들은 전국에 통문(通文)을 돌리고 회의 취지와 운영 요강을 밝혔다. 여기에서 “국가의 존망이 달린 것이므로 조그마한 땅도 양여할 수 없다.”고 밝히고 아울러 “이러한 뜻이 관철되면 그 날로 해산할 터이나, 목표가 관철될 때까지 성토·연설 운동을 전개한다.”고도 밝혔다. 전국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서울에서는 종로 상가가 문을 닫았고 전차 운행을 중단하였다. 일본 침략에 대한 성토와 연설 및 반대 선언문 발표가 연일 계속되자, 일본은 치안에 문제가 있다고 조선 정부에 항의하고 해산시킬 것을 강요하였다. 정부는 7월 18일에 3차에 걸쳐 칙사를 파견해 해산을 종용했지만 보안회는 해산하지 않았다. 다만 교통에 방해된다 하므로 집회장소를 종로에서 전동(典洞) 한어학교(漢語學校)로 옮겨 18일부터 집회를 다시 열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공사는 무장 헌병과 경찰을 출동시켜 해산을 강요하고, 송수만·송인섭(宋寅燮)·원세성(元世性) 등을 납치하였다. 7월 21일, 일제는 한국의 치안을 담당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이튿날 한어학교의 보안회 집회장소로 돌입해 총기를 휘두르면서 모든 문서를 빼앗아갔다. 그 뒤에도 양자 간에 무력충돌은 계속되었다. 이에 정부가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거절한다고 발표하자, 보안회의 집회는 해산되었고 구속자들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보안회 자체는 해체되지 않은 채 황성용(黃性溶)을 회장에 새로이 추대하였다. 그러나 9월 11일 협동회(協同會)로 명칭이 바뀌면서 활동이 위축되었다.
보안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