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 정권(崔氏政權)의 사병(私兵)으로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신의군(神義軍)을 말한다. 그것이 경찰·전투 등 공적(公的) 임무를 수행했으므로 공적인 군대에 준하는 것이다.
삼별초는 처음에 도적을 없애고 폭행을 금지시키는 등 치안 유지를 위해 최우(崔瑀, ?~1249)가 야별초(夜別抄)라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도적’에는 당시 조정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일어난 백성들도 포함되었다. 즉 야별초가 정권의 유지 수단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후 지방에 야별초를 파견하면서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다. 여기에 몽골과의 항전에서 포로로 잡혔다 탈출한 장정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하여 더하면서 이를 삼별초라 부르게 되었다.
야별초는 1220년대에, 신의군은 1250년대에 편제되었으며 이 삼별초는 대몽항전의 선봉에 섰던 정예부대로서 1270년 원종의 출륙환도(出陸還都) 명령과 삼별초 해산령, 고려 지배층의 부몽화에 불만을 품고 대몽항쟁을 선언하고 3년간 항전하였다. (삼별초의 대몽항쟁)
삼별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