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1월 30일, 월남한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반공청년운동단체.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강당에서 대한혁신청년회, 북선청년회(北鮮靑年會), 함북청년회, 황해도회청년부, 양호단(養虎團), 평안청년회(平安靑年會) 등 이북 각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여러 청년단이 대공투쟁의 능률적인 수행을 위해 통합하여 결성하였다. 통합과정에서는 평안청년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는 평안청년회 부회장이었던 선우기성(鮮于基聖)이 선출되었다. 부위원장은 함북청년회 회장이었던 장윤필(張允弼)과 대한혁신청년회 훈련부장이었던 조영진(趙英珍)이 맡았다. 기구는 중앙집행위원장 외에 11개 부서와 감찰위원회 및 지부로 구성되었다. 1947년 6월 15일에 부서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부위원장이 조영진과 문봉제(文鳳濟)로 교체되었다. 주요 활동은 좌익세력에 대한 우익세력의 선봉 역할로, 1947년 3·1절 기념식을 각각 가진 좌우익의 시가행진 중 남대문에서 충돌한 남대문충돌사건을 비롯하여 부산극장사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사무실점령사건, 정수복검사암살사건 등 좌익에 대해 테러를 전개하고 대북공작을 하는 한편 경찰의 좌익색출업무를 도왔다. 이 밖에 월남한 이북 청년과 학생들의 생계를 돕는 지원사업을 하였으며, 활동자금은 각 지방단의 유지로부터 염출하거나 미 군정청의 원조물자를 유출하여 자금화하였다. 1947년 8월,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의 합류 문제로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분열되었는데,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다. 합동반대파는 문봉제(文鳳濟)를 위원장으로, 김성주(金聖柱)를 부위원장으로 서북청년회을 재건하였다. 초기의 서북청년회가 김구(金九) 노선을 지지한 데 반해 이승만(李承晩) 노선을 따랐으나, 1948년 12월 19일에 조직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으며, 1949년 10월 18일에 단체등록이 취소되어 소멸되었다.
서북청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