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시대 지배신분층. 처음에는 관제상의 문반과 무반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국왕이 조회(朝會)를 받을 때, 남향한 국왕에 대하여 동쪽에 서는 반열(班列)을 동반(東班 : 문반), 서쪽에 서는 반열을 서반(西班 : 무반)이라 하고, 이 두 반열을 통칭하여 양반이라 하였다. 이러한 관제상의 문·무반이라는 의미의 양반 개념은 이미 양반관료체제가 처음으로 실시된 고려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고려는 혈통만을 중시하던 신라의 골품제를 타파하고 보다 광범한 재지 호족군(在地豪族群)을 국가 관료로 등용하는 집권적 양반관료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건국 초창기부터 완벽한 양반관료제를 수립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관제의 기초가 되는 관계(官階)도 고려 초기에는 신라의 관계와 태봉(泰封)의 관계를 참작하여 만든 관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문반과 무반을 처음으로 구별한 것은 976년(경종 1)에 실시된 전시과(田柴科)서부터였다. 경종 전시과에서는 고려 초기의 관계를 기준으로 모든 직산관(職散官)을 공복(公服)의 빛깔에 따라 자삼(紫衫)·단삼(丹衫)·비삼(緋衫)·녹삼(綠衫)의 4단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자삼층을 제외한 단삼·비삼·녹삼층을 문반·무반·잡업(雜業)으로 구분하여 각 품(5∼10품)에 따라 전시(田柴)를 지급하였다. 이 때 문반·무반·잡업의 구분이 단삼층 이하에만 있고 자삼층에는 없었던 까닭은 아마도 자삼층이 고려 건국 초기의 호족들의 혈족·동족 집단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반·무반·잡업의 직능별 구분은 광종 이후 새로운 관료제가 수립되면서부터 새로 구성되는 단삼층 이하에 비로소 생겼다. 따라서 경종 전시과는 신라 말 고려 초의 호족 세력이 고려 관료제에 재편성되어가는 과도적 시기에 나타난 토지반급제(土地班給制)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종 전시과의 문반·무반·잡업의 구분은 전시 지급을 위한 다분히 편의적인 구분이었다. 하지만 문반과 무반의 문자상의 기원이 여기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광종대에 4색 공복을 정하고 이 때에 이르러 모든 관리들을 문반·무반·잡업의 세 부류로 나누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문·무에 구별이 없던 신라와 고려 초기의 관계에 비하여 일보 전진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종 전시과에 있어서도 문·무반의 구분은 정식으로 관계상의 문·무산계의 구분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었다. 고려 초기의 관계에는 문·무산계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명실상부한 문·무반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문·무계가 구별되는 새로운 관계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995년(성종 14)에 고려는 당의 문·무산계를 채용하게 되었다. 이 때에 제정된 문·무관계 29계는 무산관(武散官) 중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당나라 정관(貞觀) 11년(637)에 제정된 문·무계와 같은 것이었다. 995년부터 문·무산계가 실시됨에 따라 관제상의 문·무양반체제가 갖추어졌고, 제도적으로는 문반과 무반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으로 되었다. 즉, 문반은 정치, 무반은 군사를 나누어 담당할 뿐 문반과 무반의 차별 대우는 없었다. 이것은 양반관료제를 균형있게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식 문·무산계가 실시됨에 따라 고려 초기의 관계는 향직(鄕職)으로 밀려났다. 향직은 중국식 문·무산계에 대칭되는 토착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13세기경까지 남아 있다가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995년에 제정된 문·무산계는 당의 문·무산계를 그대로 채용했기 때문에 고려의 실정에 잘 맞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문·무산계가 불균형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문반의 지위가 무반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문·무산계는 실제적으로는 고려의 실정에 맞도록 활용되고 있었다. 즉 고려의 양반체제는 지나치게 문반 위주로 치우쳐 있었다. 이와같이 불균형한 고려의 문·무양반체제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어느 정도 균형을 찾게 되었다. 즉, 1390년(공양왕 2)에 무과가 설치되고, 1392년(태조 1) 7월에 문·무산계가 제정, 실시되어 명실상부한 문·무 양반체제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이 때 제정된
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