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에 서울에서 결성된 우익청년단. 1946년 10월에 미군정의 전면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청년단이다. 비정치, 비군사, 비종파를 내세우며 청년들에 대한 훈련에 치중해 10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을 조직했다. 사상적으로는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걸어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한편 좌익 출신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도 했다. 이범석의 정치활동의 기반이 되었으며 1949년에 이승만의 지시로 해산되었지만 그 뒤에도 ‘족청계’라는 형태로 남아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1946년 10월 9일에 이범석(李範奭), 이준식(李俊植), 노태준(盧泰俊) 등 광복군 제2지대 출신들을 중심으로 최규동(崔奎東), 현상윤(玄相允), 백낙준(白樂濬), 김형원(金炯元), 김활란(金活蘭) 등 주로 미군정과 가까운 대학 총장 및 언론인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민족청년단 발기인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발기인 회장인 이범석이 단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강욱중(姜旭中) 외 36명의 전국위원과 김웅권(金雄權) 외 11명의 상임이사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사단법인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 창단되었는데, 미군정은 창단할 때부터 500만원의 지원금을 약속했으며 그 뒤 족청을 미군정 산하의 한 부서로 간주해 공식적으로 1년에 약 2,000만원의 예산을 할당했다. 족청은 최고의결기관으로 전국위원회를 두었으며, 전국위원회에서 선임된 이사들로 구성된 중앙이사회가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다. 그 밑에 도에서 면에 이르기까지 각 단위의 지방위원회와 지방단부가 조직되었으며, 각 단에 총무부, 조직부, 선전부, 훈련부, 연구위원회, 훈련소를 두었다. 중앙본부는 단장 이범석 밑에서 김형원과 이준식이 부단장을 맡았으며 조직부장 노태준, 선전부장 송면수(宋冕秀), 훈련부장 안춘생(安椿生) 등 광복군 시절부터 이범석과 함께 활동해온 이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수원에 설치된 중앙훈련소에서도 이범석이 직접 소장을 맡았으며 부소장도 송면수, 이준식, 안춘생 등 모두 광복군 출신들이 맡았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계기로 단명을 대한민족청년단으로 고쳤으며,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범석이 단장을 사임해 부단장이었던 이준식이 단장이 되고 이범석은 총재로 추대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이승만의 지시로 청년단체 통합이 추진되어 족청도 저항 끝에 1949년 1월 20일에 개최된 전국이사 및 도단장 연석회의의 결정으로 해산하고 새로 조직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해산 뒤에도 족청 출신들은 ‘족청계’라고 불리는 세력을 형성해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1953년 12월에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이들이 자유당에서 제명되면서 힘을 잃게 되었다.
조선민족청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