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전국의 청년 단체들을 포괄하여 1924년 결성된 전국 청년 단체들의 연합체.
[설명] 1924년서울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청년운동단체. 3·1운동 후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전국의 600여 청년단체를 망라해 1920년 12월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1922년 1월 김사국(金思國)·김한(金翰) 등 서울청년회 간부는 장덕수(張德秀)·오상근(吳祥根) 등 조선청년연합회 간부가 김윤식(金允植)의 사회장위원회에 관계하자 이를 배격한 데 이어, 같은 해 3월 1∼6일까지 개최된 제3회조선청년연합회대회에서 우파 간부들을 배격, 전국의 청년단체는 민족개량주의와 사회주의적 진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1924년 2월 11일 이 양 계열의 330여 대표들이 참석해 조선청년총동맹발기준비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들은 지방단체 대표 소집의 불편을 고려해 발기총회를 생략하고 결성대회를 치르기로 방침을 굳힌 다음 서울청년회본부에 창립사무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해 4월 21∼23일 서울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223개 단체 대표 170명이 참가, 조선청년총동맹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선출된 중앙집행위원은 최창섭(崔昌燮)·한종유(韓宗瑜)·신태악(辛泰嶽)·박원희(朴元熙)·정백(鄭栢)·최창순(崔昌淳)·조봉암(曺奉岩)·김찬(金燦)·인차철(印車哲)·변희용(卞熙鎔)·연재선(延在璿)·김두수(金斗洙)·김도(金濤)·조기승(趙紀勝)·김단야(金丹冶)·함선호(咸渲浩)·안준(安浚)·이운혁(李雲爀)·김교영(金敎英)·임봉순(任鳳淳)·이영(李英)·송봉우(宋奉瑀)·최창익(崔昌益)·이길용(李吉用) 등이며, 중앙검사위원은 한신교(韓愼敎)·박헌영(朴憲永)·최순탁(崔順鐸)·강제모(姜齊模)·주종건(朱鐘建) 등이다. 이로써 전국의 사회주의적 청년단체는 거의 망라되었으나 경찰이 그 해 7월 10일 3명 이상의 집회를 금지, 1930년 11월 중 전형위원들이 일일이 지방을 돌아다니며 구전방법으로 대회를 개최, 신중앙기관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같은 달 광주학생운동에 관련된 인사들의 검거선풍으로 좌익 계열 대부분이 검거되어 전중앙기관에 비하면 우익화되었다. 이 문제는 조선청년동맹(약칭 청총) 산하 지방단체의 좌익 계열을 자극, 신간회해소운동과 때를 같이해 중앙기관의 우익화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도록 하였다. 1931년 2월 11일 청총경상남도도연맹은 긴급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현재의 청총은 소부르주아지 인텔리겐치아의 비무산계급 집단이므로 당연히 해소되어야 한다.” 는 요지의 결의를 하였다. 이에 각지의 청총지방단체들도 해소론을 들고 나와, 조선청년총동맹은 청총해소대회도 없이 유야무야의 존재로 쇠퇴하여 1931년 5월 사실상 해소되어 버렸다. 좌익 계열은 이후 지하의 적색노동조합과 적색농민조합 속으로 들어갔다.

조선청년총동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