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945년 9월 16일에 지주·부르주아지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정당. [설명] 고려민주당(高麗民主黨),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국민대회준비회(國民大會準備會), 충칭(重慶)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준비위원회 등의 정당·단체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은 1945년 9월 4일 서울 종로국민학교에서 대표 82명이 모여 신당발기총회를 가지고 당명을 ‘한국민주당’으로 결정하였으며, 9월 8일에는 한국민주당 발기인 1,000여 명 명의로 조선인민공화국 타도성명서를 발표하고 충칭임시정부 절대지지 태도를 밝혔다. 이어 1945년 9월 16일에 서울 천도교기념관에서 발기인 1,600여 명이 모여 창당대회를 가졌다. 9월 21·22일에는 총회위임에 따라 지역을 안배한 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 공동비율로 8인의 총무(후일 1인 추가)와 사무국 외 각 부서와 중앙감찰위원 30인을 선출함으로써 당의 체제를 모두 갖춘다. 영수(領袖)는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문창범(文昌範)·서재필(徐載弼)·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수석총무는 송진우(宋鎭禹) 등이었다. 정강은 ①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을 기함, ② 민주주의 정체수립을 기함, ③ 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기함, ④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함, ⑤ 국제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이었다. 정책은 ① 국민기본생활의 확보, ② 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 ③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④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⑤ 중공업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⑥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⑦ 국방군의 창설 등이었다. 창당선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의 타도와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우리의 정부로 맞아들이겠다는 것을 당면한 대방침으로 삼았고, 임시정부 환국 후에도 그것으로 일관하였으나,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무렵,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운동에 동조하여 임시정부와 정치노선을 달리하고 대한민국 수립의 주요한 추진세력의 하나가 되었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군정고문 또는 군정청 요직에 다수의 당원이 앉아 미군정의 정책에 협조하여 미국의 대한정책이나 대외정책에 적극 호응하였다. 그러나 창당 초기에 내세웠던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강·정책과는 거리가 먼 대응을 보였다. 국제연합한국위원단이 그 보고서에서 한국민주당을 보수적 지주정당으로 지적하였듯이, 농지개혁에 있어서 유상매입·유상분배원칙을 고집하여 지주층의 대변자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반민족행위처벌법> 처리과정에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친일파집단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946년의 좌우합작운동이나 1948년의 남북협상문제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부정적 태도를 취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29명이 당선되는 데 그쳤다. 더욱이 1948년 5월 30일 제헌국회 개원 이후 한민당은 내각책임제 헌법안과 국무총리 지명, 조각 과정에서 이승만의 정치적 외면을 받고 대립하다가 윤치영 등 10여 명의 의원이 탈당하여 원내세력이 위축되었다. 이후 신익희(申翼熙) 세력과 지청천(池靑天) 세력을 규합하여 1949년 2월 10일 한민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을 창당하였다.
한국민주당(한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