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무장 독립군으로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항일 군대. [설명]1940년 충칭에 정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5월부터 광복군 창설을 위해 장제스[蔣介石] 주석과 교섭을 추진하여, 1940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 설치안에 대한 승인을 얻었다. 이에 임정은 1940년 9월 17일 충칭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典禮)를 개최, 광복군 창설을 공표했다. 선언문에서 “광복군은 1919년 임정 군사 조직법에 의거하여 중국 총통 장제스의 특별 허락을 받아 조직되었으며 중화민국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창군 목적을 천명했다. 총사령에 지청천(池靑天 본명 池大亨),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 총무 처장에 최용덕(崔用德), 참모 처장에 채원개(蔡元凱), 부관 처장에 황학수(黃學秀), 경리 처장 겸 정훈처장에 안훈(安勳, 본명 趙擎韓), 훈련 처장에 송호(宋虎, 본명 宋虎聲), 군무 처장에 유진동(劉振東) 등이 각각 임명하고, 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支隊)를 편성하였다. 창설 초기부터 광복군 모집 활동에 주력하였는데,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을 설치하여 모집해 온 한인 청년들에게 일정한 기간 동안 군사 훈련을 받게 한 후, 광복군으로 편입시켰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일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따라 1942년 5월 김원봉(金元鳳)이 주도하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광복군 편입이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하면서 기존의 4개 지대는 3개 지대로 재편되었다. 한편, 한국광복군은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과 협약을 맺고 특무공작훈련을 실시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미국의 OSS책임자와 한·미간의 공동 작전을 협의하고, 이들을 국내에 침투시킨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한국광복군은 조선독립동맹의 조선 의용군, 만주 지방의 동북 인민군과 함께 마지막까지 항일전을 전개한 독립군이었으나, 귀국 후 해방 정국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못했다. 대한민국 창군 과정에서도 만주사관학교와 일본사관학교 출신들에 밀려 국군의 중심역이 되지 못했다.
한국 광복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