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946년, 해방 후 첫 3·1절 기념행사를 위해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독립동맹(獨立同盟),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이 합동하여 조직한 기념행사 준비단체. [설명] 1946년 초, 좌익측은 3·1기념투쟁위원회(3·1記念鬪爭委員會), 우익측의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 준비위원회(己未獨立宣言全國大會 準備委員會)로 나누어 각각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46년 1월 14일에 담화를 발표하여, 3·1운동 기념대회를 민주주의 각 정당, 대중단체의 연합으로 성대하게 치를 것을 제의하였다. 2월 12일 신한민족당, 조선인민당,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국민당(國民黨), 조선공산당, 독립동맹, 조선민주당 등 7개 정당 대표자들이 신한민족당 사무실에 모여 기념행사의 통일을 결의, 기성의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 준비위원회 및 3·1기념투쟁위원회는 발전적 해소를 단행하고, 기념행사를 7개 정당에 일임하고 대회의 명예의장은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으로 일제 지배하에 변절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추대하자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주당과 국민당이 공동성명에 참가할 수 없다며 퇴장하여, 결국 5개 정당만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3·1기념투쟁위원회를 즉시 해소하고 5개 정당을 중심으로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다. 이후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 측의 행사 통합에 대한 거듭된 제안과, 자유신문(自由新聞), 조선통신(朝鮮通信), 중앙신문(中央新聞), 공립통신(共立通信),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 서울타임스, 합동통신(合同通信), 동아일보(東亞日報), 코리아타임스, 서울신문, 한성일보(漢城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등의 일간(日刊)통신·신문대표자회의를 통해 제안한 4개 항목의 통일안도 기미 측에서 거부한다. 결국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의 기념행사는 3월 1일 남산공원 광장에서, 기미 측은 서울운동장에서 각각 개최되었다.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